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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

삶의 현실이 뭘까?

아이를 키우는 혹은 키웠던 부모로서 나 스스로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한다. 나부터가 그렇다. 하지만 현실론이란 단어는 실상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며 세상에서 아주 남용되는 단어다. 현실론이란게 뭘까? 왜 현실론은 남용되는 단어일까?

 

 

 

왜냐면 현실론이란 말은 대부분의 경우 그저 나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현실론이란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설사 현실론이란 이름아래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에도 현실론을 외치는 두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는 객관적 세상이라는 것이 오직 하나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정확히 모르는 단 하나의 그 현실이 뭐냐는 것 뿐이다. 

 

이런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 당연한게 아니라고 말하면 과학도인 나에게 과학적 세계관이 뭔지를 설명하려고 달려들 사람이 꽤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언어의 남용이다. 

 

과학은 인간이 가진 지식중 가장 시공을 초월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중력법칙은 100년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고 미국과 한국에서 같다. 현실이라는 것은 그래서 과학적 문맥에서는 존재하며 중력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별 문제없이 쓸 수 있다. 과학에서는 착시를 논할 수 있다. 즉 단하나 존재하는 진짜 현실은 이러저러한데 어떤 경우 우리가 잘못봤다는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 관찰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에서는 우리가 과학에서 말하는 것같은 '현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문맥에서 말하는 현실이란 사실 대개 인간의 믿음과 관습이다. 과학적 실재론은 인간의 마음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는 것인데 과학적 실재론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의 믿음과 관습을 현실로 부르면서 현실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얼마나 엉터리인가. 중력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성황당의 신이 존재하는 것은 현실이라고 말하면서 그게 왜 현실이냐고 하면 모두가 그렇게 믿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엉터리가 아니겠는가. 

 

사회적 공간에서의 현실에 대한 유치하지만 간단하고 극명한 예는 이런 것이다. 내가 못생겼다는 것은 현실이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이 문장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가 이 말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문장의 의미를 알아들을 것이며 그게 현실이라고 인정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란 과학적 현실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저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이다. 부자와 가난뱅이도 그렇고, 똑똑한 것과 어리석은 것도 그러하며 귀하고 천하다는 것도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돈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 돈도 사람들의 믿음 즉 신용이다. 내가 신던 신발을 들고 나가서 이 신발이 100억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걸 믿으면 그 신발은 100억의 가치를 가진다. 그렇게 거래되고, 그 신발을 주고 빌딩과 교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소위 '현실'이다. 수도권에 널려있는 비싼 부동산들의 가격이 현실인 것은 적어도 상당부분 그 부동산이 가지는 투자가치에 대한 믿음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 현실이 아니다. 주식이나 아파트의 가치를 증명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과학은 인간의 믿음이나 가치에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생활에서 가치를 논하는 것은 모두 믿음과 마음에 관련된 것이며 그것들은 과학적 실재론이나 현실론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현실론같은 단어를 써서 말하는 사람중에 가치와 관련된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학문의 세계 바깥에서 정치나 사회적 현실을 말하면서 가치문제와 무관하게 현실론같은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있던가? 가치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비학문의 세계사람들이 입아프게 왜 말을 할까? 학문의 세계에서도 물리학자나 수학자 혹은 화공학자들은 그런말을 잘 안쓴다. 경제학자나 인문학자나 그런 걸 쓸법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도 모두가 아니면 대개 가치와 관련해서 현실론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현실이란 단어를 말하면 우리는 그것이 십중팔구는 언어의 남용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 뜻은 그저 내가 믿는 걸 너도 믿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한 말들에 대해 누군가는 이런 논리를 펼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가 둥글고 우주공간을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태양도 움직인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땅이 평평하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태도가 꼭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의 사회적 믿음, 관습, 법따위는 물론 과학법칙처럼 불변은 아니지만 마치 지구중심적 사고가 꼭 필요한 좋은 근사이듯이 사회나 역사가 가지는 거대한관성을 생각해서 그 믿음과 관습을 현실로 부르는 것도 필요하고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짧게 말하자면 이 말은 옳다. 하지만 결국 한계는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론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조건 중의 첫번째는 무엇보다 우리가 항상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듯이 현실론이란 말의 한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론이니 현실이니 하는 단어를 쓸 때 우리는 우리가 원시인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 역사는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세상은 장소마다 달라서 균질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냥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하다고, 원래 그렇다고, 그게 현실이라고만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는 중력법칙처럼 확실한 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는 넓고 넓은데 인간 개개인의 기억력과 인지능력은 유한하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시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저 서너 사람만 모여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남은 한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던 생각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이걸 밝혀주었던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바로 솔로몬 애쉬의 동조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솔로몬은 겨우 몇명에 불과한 주변 사람들이 틀린 답을 말할 때 거기에 동조하도록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이미 상당하다는 것을 밝힌다. 대부분의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결국 우리 주변의 몇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다시 말해 그 작디 작은 세계의 특징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우리는 대개 그다지 거대한 관성을 가진 사회의 특성만을 논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안 그런것 같아도 그 현실이란 그저 그냥 당신주변에만 있는 편견일 뿐이다. 현실론의 한계는 이렇게 분명하다. 

 

게다가 우리는 요즘 세상은 균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리 변하기도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제의 상식이나 현실이 오늘의 웃음거리이며 농담이 될 수 있다. 브렉시트처럼 지구반대편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한국인의 삶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21세기다. 오늘날은 위에서 말하는 그 관성을 가진 사회의 테두리라는 것이 고정되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복되고 중첩되어 존재한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자란 사람이 한국에서 사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테두리의 중첩과 전복속에서 우리의 기준은 마구 뒤집어 진다. 

 

예를 들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 소득이 얼마나 될까? 한국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은 그 평균보다는 훨씬 높은 소득과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한국사람들에게 아 난 부자구나 하는 실감을 주는가? 전세계에서 8억명의 사람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일 2만5천명이 굶어죽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일상속에서 그것은 삶을 위해 전혀 충분하지 않다. 나는 굶어죽지는 않으니까 부자구나, 행복하구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충분할 수가 있는가. 굶어죽지만 않으면 학비가 없고, 옷살 돈이 없으며, 외식할 돈도 없고, 고시원 쪽방에서 부실한 난방으로 살아도 나는 부자라면서 흡족하게 살 수 있는가? 적어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해도 바람직한지 알 수 없다. 사실 어떤 한국 사장이 한국인 노동자들의 월급을 깍으면서 전세계 평균 노동임금을 생각하자고 한다면 극단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어떤 나이든 사람들은 청년들에게 사랑이나 결혼따위는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으며 암보험에 들거나 죽을 때까지 쓸 노후자금을 모으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현실론을 펼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보험에 들거나 노후자금을 모으는 것에 관련된 것이라는 말은 그저 죽을 날을 잡아놓은 노인의 말일 뿐이다. 보험이나 노후자금이 안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목표가 10억모으기가 되는것이 당연하지는 않다. 우리는 노인들의 현실에 빠져들지않도록 조심도 해야 한다.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이 질문의 답은 끝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윤리와 상식도 흔들린다. 현실? 어느 테두리의 현실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 현실에 만족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그게 어느 기준인지 당신은 알고 있나? 최저임금은 천원이어야 하나 만원이어야 하나? 한국의 남자나 한국의 여자는 분노의 대상인가 감사의 대상인가. 한국의 교육현장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남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현실을 보는 틀 혹은 현실이 가진 테두리는 당연한 것인가? 

 

요즘 세상에서 현실이란 자기 정체성처럼 혹은 우리의 미래처럼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발견해 나가야 하는 어떤 것에 더 가깝다. 즉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환경을 발견하거나 그런 환경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냥 객관적으로 외부적으로 주어지는게 아니다. 흔한 의미에서 현실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적 시각없이, 사람들의 마음에 상관없이 혹은 나의 마음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외부적 현실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론의 그 현실이 그저 우리가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밖에 없는 외적 환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 배우로 일하는 사람중에서 25살에서 35까지동안의 10년 평균을 냈을 때 국민전체의 평균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은 1%가 안된다. 

 

이 말은 언젠가 본 진짜 통계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 만들어 낸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말의 정확성이 아니라 이 말이 통계적으로 사실이며 따라서 그걸 누군가가 현실이라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통계는 당신이 만약 복권뽑기처럼 직업을 선택한다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사고에 빠져들면 당신은 어느새 당신을 그저 지구위에 존재하는 70억 중의 하나 혹은 한국에 존재하는 5천만중의 하나로 만든다. 당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 지구나 이 우주에 하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는다. 그런 사고에 빠져들면, 돈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이나 당신이 배우가 되기 위해 그리고 배우로 살기 위해 흘릴 땀과 눈물을 다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게 흔한 현실론이다. 하지만 설사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배우로 실패할 거라고 예측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뭘 믿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잘 모른다. 자기 살기도 바쁘다. 지구위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삶이 실패라고 생각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스스로 자기의 삶이 무엇이었냐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론에 대해 말할 것은 당신은 당신이 작은 원자처럼 고립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당신의 행복은 사람들과 이 세계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타인이 주는 현실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고립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좋은 예가 바로 가족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현실을 말한다. 자식도 부모에게 현실을 말한다. 이 현실의 충돌이 서로에게 자신만의 현실을 강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첫번째 이유는 자식과 부모는 하나가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서 그렇다. 자식의 현실로 부모를 괴롭히거나 부모의 현실로 자식을 괴롭혀봐야 결국은 불행할 뿐이다. 하지만 부모도 자식도 그저 다 유한한 사람이라 때로는 그런 일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유한한 우리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현실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사실은 이미 도달한 현실도 지켜내지 못하며 무너지는 자신의 현실을 부지런히 수선하며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공유하는 하나의 현실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고 그것은 우리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당신만의 현실에 빠져들 때 당신의 현실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빠져나와야 할 첫번째 현실론은 그래서 우리가 홀로 존재하며 이 몸뚱아리가 나라는 현실론일지 모른다. 그게 우리가 자기를 지키면서도 세상으로 계속 손을 내밀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언젠가 우리가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좀 더 비슷한 현실을 공유하며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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